크메르 제국의 후예 - 캄보디아Camb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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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떠나자/캄보디아Cambodia

크메르 제국의 후예 - 캄보디아Cambodia

by 백조를 꿈꾸는 미운오리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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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Cambodia

수도

프놈펜

언어

크메르어

화폐

캄보디아 리엘(KHR)

종교

불교 95%

국기

가운데 백색 그림은 캄보디아 문화유적 앙코르와트를 형상화한 것이며 바탕의 붉은색은 불의에 대한 투쟁과 강인한 캄보디아 정신을, 청색은 캄보디아의 농업과 환경을 상징한다.

 

역사

크메르족의 기원에 대한 주장은 여러 가지이다.

중국과 인도에서 온 이민자들의 혼혈이라는 주장도 있고 동남아시아의 섬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캄보디아 동부에서 발견된 뼈는 기원전 15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써 원시인과 오늘날의 크메르족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이 밝혀졌다.

초기

첫 크메르 왕국인 후난(Funan)1세기에 나타났다.

후난 제국은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문자와 예술이 발달한 문명이었다.

인도의 무역상들은 기원전 200년 경 캄보디아에 산스크리트어, 힌두교, 불교를 가져왔다.

크메르족은 이 인도화 과정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1세기에서 5세기까지 왕실의 기록은 산스크리트어로 쓰였고 사람들은 시바신과 비슈누 신을 숭배했다.

후난 제국은 현재의 바프놈과 메콩 삼각주 근처의 베트남 북부를 거점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 대부분은 후난을 통일 왕국이 아니라 서로 전쟁을 했지만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중국에 조공을 바칠 땐 단일 국가의 모습을 보였던 많은 소국가들 중 하나로 보고 있다.

6세기 무렵 강력했던 후난 제국은 쇠퇴했으며 첸라(Chenla)가 등장했다.

첸라는 후난의 속국이었으나 독립하여 힘을 길러 결국 후난 제국을 정복했다.

첸라는 서기 802년까지802 절대적 권력을 가졌지만 역시 단일 국가는 아니었다.

현존하는 산스크리트어 비문을 보면 이 시기에 캄보디아에 수많은 작은 왕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앙코르의 흥망

802년 왕위에 오른 자야바르만 2세는 자신을 데바라자(신왕)라고 선언하며 수세기에 걸쳐 신왕의 통치를 최초로 시작해 신앙을 창조했다.

9세기 야소바르만 1세는 수도를 앙코르로 옮기고 앙코르는 학술, 숭배,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여러 왕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다가 수리야바르만 2세의 통치하에 캄부자가 강성해져 참파(현재 베트남 중부),안남(현재,베트남 북부) 그리고 사암(현재 태국)을 아우르게 되었다.

1130년 수리야바르만 2세는 힌두교의 비슈누를 기리기 위해 앙코르 사원을 건설했다

1177년 베트남의 참족이 앙코르 사원을 약탈했으며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돌려받지 못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국 역사상 가장 많은 건축물을 지은 왕으로 오늘날 알려진 고고학적인 보물 들 중 다수가 그의 통치기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자야바르만 7세 이후 왕국은 쇠퇴했고 1432년 강성해진 시암 왕국이 앙코르를 함락하자 크메르족은 프놈펜으로 이주했다.

프랑스의 등장

1858년 동남아시아 정복에 나선 프랑스인들은 베트남 사이공에 본부를 설치하고 캄보디아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 노로돔 왕이 시암인들을 물리치고 프랑스에 원조를 요청했고 프랑스인들은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1884년 노로돔 왕은 대포의 위협하에 또 다른 조약에 서명했으며 이 조약으로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를 향한 분개와 저항이 수년간 이어졌으며 보호령 조약을 체결한 후 프랑스가 씨엠립과 밧땀방을 요구하는 시암의 주장을 인정하자 캄보디아는 배신을 느껴 1953년 노로돔 왕의 승계자인 노로돔 시아누크 왕은 프랑스의 철수를 요구하며 망명을 했고 프랑스는 국제적 망신을 생각해 결국 철수했다

독립

군주에 의한 절대적 통치보다는 독립적으로 선출된 국가 원수를 요구하는 국민들 때문에 노로돔 씨하눅 왕은 왕좌를 포기하고 자신의 정당을 만들었다.

왕관을 아버지인 노로돔 수르마릿에 넘겨주고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고 나자 그는 국가 원수의 자리를 차지하여 캄보디아의 전능한 1인 정치 독점을 이루었다.

노로돔 씨하눅 왕은 캄보디아를 중립국으로 선언했지만 중국 공산당과의 친밀한 관계는 당시 북베트남 공산당과 싸우고 있던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친미세력인 론놀 장군의  등장으로 문제는 심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론놀 장국은 자신의 정당인 크메르 공화국과 함께 노로돔 왕을 타도했다.

새로 등극한 론놀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미국은 베트콩을 몰아내려는 목적으로 캄보디아의 농촌지역을 폭격했다.

이에 농촌 거주자들은 반군을 일으켰고 이 농군은 노로돔 씨하눅 왕의 요청에 의해 론놀에 저항하여 싸우게 되었다.

씨하눅 왕은 이 반군의 별명을 크메르 루주라 지었고 군데를 이끈 지도자는 폴포트이었다.

크메르 루주의 정권 이양

1975년 무장한 군인들이 프놈펜의 정부 건물, 사무실, 가정에 들이닥쳤다. 쫓겨난 정부 관료들은 농촌으로 이동해 폴포트혁명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차후 4년간 강제 노동을 했다.

폴폿은 극단적인 모택동주의 정권을 통해  캄보디아를ᅟ농촌 유토피아로 만들 계획은 세웠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해 쉽게 주무를 수 있는 캄보디아의 농민들은 구 인류’, 크메르 루주가 혐오하는 도시 사람들은 신 인류로 분류되어 폴포트 정권에서 신 인류는 전혀 인권을 보호받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문자 교육, 예술, 음악, 종교가 모두 폐지되었고 교육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자는 누구든 즉시 처형당해 가족들은 흩어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주림과 고통에서 탈출했다.

1978년 베트남이 쳐들어왔고 1979년 크메르 루주 정권은 실각하고 폴포트은 도망쳤다.

일종의 평화

피로 물든 정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심각한 기근과 싸워야 했다.

198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했고 수년간 정치 약어들이 캄보디아를 수놓았다.

당시 총리인 훈센은 캄보디아 인민당을 통치했고 노로돔 씨하눅 왕의 아들인 라나리드 왕자는 훈신펙(왕당파 정당)을 이끌었다.

론놀 휘하의 장군이었던 삭 수차칸은 불교 자유 민주당을 지도하였다.

크메르루주 게릴라는 여전히 캄보디아 북부와 서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세력이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싸웠다.

이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었고 결국 유엔이 개입하게 되었다.

유엔의 감독하에 모든 정당이 자유선거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협정이 파리에서 체결되었다.

1992년 평화를 유지하면서 국가의 전반적인 재건을 감독하고 민주 선거를 하는 캄보디아 과도 행정기구가 도입되었다.

선거에서 훈신펙이 승리하였지만 훈센은 특유의 위협과 협박으로 제2총리 자리를 요구하는 등 권력을 얻으려 했고 캄보디아 과도 행정기구는 이를 동의해 두 정당은 연합을 이루에 되었다.

1997년 훈센은 무력 정변을 일으켜 제1총리인 라나리드 왕자 정권을  정복했다.

크메르 루주의 최후

크메르루주들의 대학살에 관한 국제재판이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었고 크메르루주에서 가장 악질적이었던 폴포트와 따목은 죽었고 다른 이들은 늙어가고 있었다.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정의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크메르루주 정권을 겪어보지 못한 신세대 캄보디아인들은 재판에 할당된 엄청난 예산을 돌이킬 수 없는 과거보다는 캄보다이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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