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크레더블 인디아 인도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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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떠나자/인도India

인크레더블 인디아 인도India

by 백조를 꿈꾸는 미운오리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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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India

 

국명

인디아 공화국 Republic of India

 

국기

식민 압제로부터 벗어난 장를 상징. 맨 위의 선홍색은 용기, 희생, 부정의 정신, 흰색은 순수함과 진실, 녹색은 신념과 풍요를 상징한다. 가운데 원모양은 물레바퀴를 형상화한 것으로 독립의 의미. 정식 명칭은 간디 플래그 Gandhi Flag

 

 

 

수도

뉴델리

 

종교

인도에는 종교라는 말이 없을 정도로 삶 자체가 종교적이다. 종교에 따라 복장도 달라지고 인사말도 다르다. 인도는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상지이며 오랜 시간 동안 세계 각지에서 전파된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영향을 받아온 곳이다. 인도인 80%이상은 힌두교, 이슬람교 10%, 시크교, 자이나교, 기독교, 불교가 있다.

 

시차

인도는 광활한 대륙이지만 단일 시간대를 쓰고 있으며 한국과의 시차는 3시간 30분 느리다.

 

인도의 언어

공용어로는 영어와 힌디어를 포함해 약 15개의 언어가 인정된 주요 언어다. 인도의 국어는 힌디어로 북부 인도를 중심으로 40%의 사람들이 사용한다.

 

통화

인도 루피 Rs,

 

인도의 역사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나라 인도는 문명과 종교의 탄생, 셀 수 없이 많은 정복과 침략의 격변을 끊임없이 겪어 왔다. 5000년이 넘는 긴 역사 속에서 정치적 통일을 이룬 왕조는 마우리아, 굽타, 무굴 3개에 불과한데 지역과 부족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도의 역사는 인도만의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 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인더스 문명

오늘날 파키스탄을 관통하는 인더스 강을 따라 형성된 문명을 인더스 문명이라고 하며 황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세계 4대문명으로 분류한다. 인더스 문명은 바둑판 모양이 계획도시와 상하수도 시설 등을 갖추고 있으며, 상형 문자를 사용했다. 인더스 문명의 안장에는 이미 요가 하는 사람에 대한 묘사가 있어 이때부터 인도 고유의 요가수행이 성행했음을 부여주기도 하며 발굴된 유물 중에서 시바 신과 깔리 여신의 형태를 한 점토들은 훗날 힌두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아인의 이동과 베다의 성립

유목민족이던 아리아인들이 원래 터전인 시베리아 남부, 투르키스탄 등의 목초지에서 기원전 1800년경부터 이동을 시작해서 기원전 1500~1300년경에는 인도 서부의 펀잡 지방을 기점으로 그들의 활동 역역을 확신시켰다. 정복자는 피정복 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이로 인해 최초의 카스트 형태가 생겨났다. 당시에는 정복 민과 피정복 민 사이를 구분하는 정도였으나 정복민 간에도 구분이 좀 더 세분화 되어 오늘날과 같은 단계인 사제 계급이 브라만, 무사 계급인 차트리아, 상인 계급이 바이샤, 노예 계급인 수드라로 분화한다. 인더스 문명이 쇠퇴한 시기에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가 쓰였는데 정치적 우위에 있는 브라만에 대한 사상적 저항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불교와 자이나교는 모두 베다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했고 카스트 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마우리아 제국

기원전 327년 인도로 침입한 알렉산더 대왕은 2년 동안 인도 땅에 머물렀지만 인도 문화사에 영향력을 미쳤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 문화와 인도 문화가 결합되어 탄생한 간다라 미술이다. 정치적으로 알렉산더의 인도 침입은 인도 서북 국경에 힘의 공백을 초래했고 공백을 메우며 패권을 쥔 사람이 바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다. 당시 마가다국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린 후 인도와 인더스 강 유역의 그리스계 식민 도시들까지 모두 점령해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쇼카 왕의 통치하게 전성기를 누렸다. 오늘날의 타밀나두를 제외한 남인도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전장에서 환멸을 느끼고 불교로 개종했고 이는 불교이 세계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우리아 왕조는 아쇼카 왕의 사후 급격히 분열, 멸망했다.

 

굽타 왕조

마우리아 제국의 몰락 이후 약 400년간 통일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하다가 굽타 왕조의 등장으로 다시 통일 국가를 이룬다. 굽타 왕조의 전성기였던 6대왕 찬드라굽타 2세는 종교와 예술 문학 등을 크게 발전시켜 문화적 르레상스를 이루었다. 같은 시기 남부 인도에서는 900년경 촐라 왕조가 타밀나두 지역을 중심을 300년간 남인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다. 북인도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남인도의 왕조들은 이집트와 로마를 포함한 다른 문명과의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는데 힌두 왕조였던 빨라바는 바로크 양식과 흡사한 드라비디안 건축을 선도하며 마말라푸람, 깐지푸람, 뜨리찌 등에 바위 사원을 만들었다.

 

델리 술탄국

1000년경부터 오늘날 아프카니스탄 땅인 가즈니를 거점으로 삼은 가즈니의 마흐무드는 1026년까지 17차례에 걸쳐 인도를 침략했으며 1206년 이슬람 왕국을 세우고 술탄을 자처했다. 인도 지배의 서장을 연 것은 꾸뜹 웃 딘 에이백Qutab ud din aibak으로 델리에 엄청난 규모의 궁전과 모스크, 탑을 남겼는데 꾸뜹 웃 딘 에이백의 조상이 터키계의 노예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왕조를 노에 왕조라고 한다. 노예 왕조를 이은 할지 왕조, 투글라크 왕조, 샤이이드 왕조 로디 왕조 등의 이슬람 왕국들이 차례로 등장했지만 모두 단명했다.

 

 

버마니 왕조와 비자야나가르 왕조

북인도에서 델리 술탄국들이 세워지고 멸망하는 12세기 남인도에서는 자인교와 힌두교를 믿던 호이샬라 왕조가 벨루르와 할레비드 지역에 독특한 건축물을 세우며 1000~1328년까지 번성했다. 1328년 술탄국 투글라크 왕조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 바마니 왕조와 비자야나가르 왕조가 남인도를 양분하게 되는데 다이아몬드 생산지를 두고 매년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바마니 왕조의 총리가 암살되면서 분열되어 비자야나가르 왕조가 남인도를 지배하였지만 주변의 이슬람 왕조의 침입으로 무너져 버렸다.

 

무굴제국

징기스칸의 후손인 바부르는 1526년 북인도의 로디 왕조를 격파하고 라자스탄의 메와르 왕조, 벵갈의 술탄 등을 꺾고 무굴 제국을 세운다. 무굴 2대 황제 후마윤 대에 이르러 인도 전 지역을 잃으면서 멸망하는 듯 했지만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후마윤은 다시 재기에 성공하고 악바르의 치세에 이르러 제국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제국이 안정된 시기의 악바르의 뒤를 이은 제항기르의 뒤를 이은 샤 자한은 건축 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그라의 타지마할과 델리의 랄낄라, 자마 마스지드 등 수많은 건축물을 남기게 되는데 왕위를 아들에게 찬탈 당하고 아그라성에 7년 유폐 끝에 죽게 된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에 앉은 아우랑제브는 남쪽(현재의 아우랑가비드)으로 수도 이전과 영토 확장하며 인도를 이슬람의 국가로 만드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탄압에 이한 힌두교도들의 반발과 부정부패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무굴 제국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식민 지배의 시작

고대 인도는 향신료가 생산되는 세계에서 유일한 땅이었고 인도 무역은 유럽인들이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세 이후 이슬람교가 유럽과 인도의 길목을 막으며 직접 무역은 불가능해서 육로가 막힌 유럽인들은 바닷길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유럽 열강 중 인도에 가장 먼저 진출한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1948년 인도에 도착한 포르투갈은 아랍 상인들을 제압하고 인도와 유럽 사이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으며 무굴 황제 샤 자한의 허락을 받아 뭄바이와 콜카타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 인도 무역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자금이 여유롭지 못한 포르투갈은 17세기 인도에 도착한 ,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 밀려나고 말았다. 1611년 동인도 회사를 설립한 영국은 뭄바이, 콜카타, 첸나이 등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동인도 회사가 주도하는 식믹지화를 진행하며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등 인도지배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가 영국이었다. 1857년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한 간접 통치에 반발해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무력으로 진압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을 선포하여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독립과 분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인도가 전쟁에 적극 참여하면 그 대가로 자치권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모든 집회를 금지하는 악법 로울라이트법을 제정 인도 민중의 정당한 권리마저 빼앗으려했다. 1919년 암리차르에서 집회금지법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이던 인도 군중들에게 영국군이 무차별 발포, 희대의 학살이 벌어지며 인도의 민족 해방운동은 뚜렷한 방향성을 갖게 된다. 암리차르 학살 사건 이후 새로운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를 국부로 추앙받으며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무장 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이 아닌 비폭력 무저항, 국민적 총파업을 통한 압박을 하게 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의 집권당이 바뀌며 종교로 감정이 깊어진 인도를 힌두교 우세 지역은 인도, 이슬람교 우세 지역은 파키스탄으로 나누어 개별 독립시킨다는 안을 통과시켰다. 인도의 분리 독립은 종교적, 영토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의 갈등을 야기했으며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고 아직까지도 긴장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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