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근교 - 베르사유궁전Château de Versailles 생말로Saint-Malo 몽생미셸 Mont-Saint-Michel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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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근교 - 베르사유궁전Château de Versailles 생말로Saint-Malo 몽생미셸 Mont-Saint-Michel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by 백조를 꿈꾸는 미운오리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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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

프랑스 절대왕정이 절정을 구가하던 17세기 중반 루이 14세에 의해 지어졌으며 프랑스를 통치하는 200여 년 동안 왕가의 공식 거주지였다. 1789년 대혁명이 발발로 왕조가 몰락할 때까지 16~18세기 프랑스의 정치, 문화, 예술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짐이 곧 국가다를 선언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그만큼 더 크고 웅장하고 더 화려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2세기에 걸친 낭비 끝에 왕국은 멸망의 길을 걸었지만 수십 개의 부속 정원, 그랑 트리아농과 프티 트리아농, 왕비의 촌락 등을 망라한 거대한 유산은 그 시대의 영광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베르사유는 루이 13세가 초석을 다지고 루이 14세가 넓혔으며 루이 15세가 꾸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증축된 성이다. 궁전은 2300여 개의 크고 작은 공간으로 나뉘고 이중 1000여개를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3세가 사냥터의 별장으로 사용하던 것을 파리의 루브르 궁에 싫증을 느낀 루이 14세가 파리의 혼란을 피할 목적으로 1662년부터 1710년에 걸쳐 지은 궁전이다. 그때 유럽은 대소 봉건국가가 난립하던 때라서 루이 14세에게 있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궁전 건립은 절대왕조의 구축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1660~1715년 루이 14세 통치 기간에만 네 번의 대형 증축이 있었으며 이 기간 중에 거울의 방은 물론 현재의 궁전이 형태를 잡았다. 기초 설계는 건축가 르보, 조경사 르 노르트 그리고 장식가 르 브륑이 맡았다. 수많은 유럽의 왕들이 모방 삼아 궁전을 지었을 만큼 화려하고 웅장한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 드 프랑스 지역 중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다.

베르사유 궁전 가운데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은 거울의 방으로 17개의 커다란 아치형 창문과 17개의 아치형 거울이 서로 대치되어 있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거울에 그대로 반사되어 방 전체가 화려하다. 천장에는 샹들리에와 도금과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국가의 주요 연회나 행사가 이곳에서 개최되었고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 베르사유 조약도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베르사유 궁전

 

생말로Saint-Malo 

생말로는 영국 해협을 마주한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역 일에빌렌 주에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항구 도시다. 16세기에는 독립 국가 개국을 추진했을 정도로 수출입 산업이 발달했고 영국과의 밀접한 문화 교류로 인해 현재까지도 지방색이 뚜렷하다. 15세기 초에는 브르타뉴 군주 가문의 장 5세가 성채를 짓기 시작했다. 영국군이 대륙 입성을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생말로의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자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였다. 1475년 사령탑이 완성되고 1501년에는 불만의 탑이 성벽을 이었지만 혁명과 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되었다.

불만의 탑의 정식 명칙은 작은 망루다. 불만의 탑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브르타뉴 가문의 안 공주는 시민들의 불만에도 탑을 세웠고 불만스러워하라지 그 또한 내 즐거움이니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시민들의 원성조차 대의를 위한 부산물로 보겠다는 의미로 이 말을 비꼬아 이런 이름이 붙었고 탑의 한편에 새겨놓기까지 했다고 지금은 정당한 시민권을 주장한 혁명가들에 의해 지워졌다.

생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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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생미셸 Mont-Saint-Michel

영국해협을 마주한 망슈수에 천혜의 자연으로 둘러싸인 생미셸 산이 있다. 그리고 92m 정상에 그 이름을 딴 수도원이 있다. 708년 오베르 주교는 꿈에서 대천사 생미셸의 계시를 3번이나 받고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966년 베네딕트파 성직자들이 머무르며 섬 내부의 마을은 커지기 시작했으며 14세기에 이르러 바위산을 걸어 올라갈 수 있을 만큼 확장되었다. 그리고 100년 전쟁 당시 영국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요새로서 국가의 주체성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E한 프랑스 대혁명 기간에는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의 형태를 따라 아래에서 조금씩 지어 올렸고 정상에 위치한 수도원은 예배당과 라 메르벵로 나뉘는데 현재의 성당은 12세기와 15세기에 무너져 내린 벽과 제단을 1780년에 증축한 것으로 불꽃 고딕 양식을 보여준다. 성 내부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이 혼재되어 뚜렷한 대비를 나타내고 있다.

몽생미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스트라스부르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독일과 국경이 맞닿아 잇는 이곳은 오랫동안 독일과 프랑스가 쟁탈전을 벌였던 곳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주민 투표를 통해 프랑스령이 되었다.

스트라스부르

구텐베르크광장Place Gutenberg

역사 수업에 등장하는 인물 ‘구텐베르크’‘구텐베르크’ 금세공업자였던 구텐베르크는 1450년경 금속 활판 인쇄술을 고안해 42행 성서를 인쇄했다. 이는 단순히 발명의 역사가 아니라 무지의 중세시대에 여명을 밝혀준 혁명적인 사건으로 활자를 통한 대량 인쇄 기술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가 일반인에게도 손쉽게 보급되게 계기를 만들었다. 마틴 루터의 면죄부 반박문이 인쇄됐을 때는 불과 22달 만에 유럽 전역에 퍼져 종교개혁을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tre Dame de Strasbourg

1176년에 건축을 시작해 1439년 완공 후, 1880년까지 증축한 뒤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700년의 긴 세월 동안 지어졌다.  이 성당은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중세 고딕 양식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건물이다. . 142m 높이의 첩탑은 19세기 전까지 기독교 국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붉은색 사암으로 지어진 탓에 태양의 빛과 하늘의 색깔에 따라 시시각각 색이 변하여 신비롭다.

노트르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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