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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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조를 꿈꾸는 미운오리 세상을 날다
여행의 단상

동행 - 미얀마

by 백조를 꿈꾸는 미운오리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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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파안’에는 유독 동굴 사원이 많았다. 동굴 내부는 불심만큼 헤아리기 힘든 부처상들과 천장이나 벽면 가리지 않고 그리거나 새겨진 부처의 모습들로 가득했다. 동굴 사원들의 첫인상은 비슷한 듯하지만 내부는 자연이 만들어낸 곳이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그 모습을 달리했으며 색다른 매력을 풍기며 호감을 자극했다.

 

‘파안’에서의 하루는 시내 주변에 흩어져 있는 사원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기사가 딸린 오토바이 택시를 대절해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인적도 드문 허허벌판을 지나면 카르스트 지형의 바위산이 나오고 그곳에는 동굴 사원이 있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둘러보고 간 마지막 사원. 동굴 입구는 여느 동굴 사원과 비슷했다. 진종일 더위에 지친 나는 사원의 내부보다 동굴이 주는 시원함과 청량감이 더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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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사원과 마찬가지로 입구에 자리한 큰 불상에 의미 없는 눈길을 주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아무도 없었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동굴 내부의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어둑어둑하고 습하며, 좁은 동굴 내부의 적막감은 으스스함마저 느끼게 했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아무도 없다는 섬뜩함이 밀려오고, 되돌아가자니 끝이 궁금했다. 아무도 없다는 공포감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나의 발을 붙잡았다. 특별하게 불길한 상상을 한 것은 아니다. 심해 같은 고요함과 살아있는 생물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상황이 주는 공포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동굴 한가운데서 갈등을 하는 사이 한 소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입구에서 본 아버지와 같이 왔던 10살 남짓의 소녀였다. 소녀도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혼자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와, 그리고 동굴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기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소녀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 최선을 다해 소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녀는 수줍게 화답했고 나는 손가락으로 동굴 끝을 가리켰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존재에 용기를 얻어 앞장서 걸었다. 내 옆으로 올 줄 알았던 소녀가 보이지 않아 뒤 돌아보니 열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가다가 돌아보면 더도 덜도 아닌 딱 열 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소녀는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내가 멈춰 돌아보면 걸음을 멈추면서. 우리는 그 상태로 동굴 끝까지 갔다. 발을 붙잡던 공포감은 사라지고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에 여유로움까지 더해 동굴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동굴 끝에 다다랐을 때 환한 빛이 보였다. 동굴 위쪽에 동그란 구멍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환생해서 하늘로 올라갈 때처럼 어두운 주변을 뚫고 한줄기 빛이 내리는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나왔다. 소녀도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여전히 나와는 거리를 둔 채로. 햇빛 쏟아지는 아래에 있는 불탑에서 소녀는 기도를 했고 나는 그런 소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아니 소녀를 기다렸다. 소녀의 기도가 끝났을 때 우린 신호를 주고받듯 눈을 마주친 후 다시 돌아온 길을 걸었다. 입구에 도착하니 소녀의 아버지가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버지를 보자마자 달려가 버린 소녀는 그렇게 가버렸다. 내게서 잘 가라는 말도, 고마웠다는 말도 듣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소녀와 아버지

 

살아가는 데 있어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같이 가자 손잡으며 말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 응원해주지 않아도, 혼자가 아님을 알았을 때 오는 안도감이 주는 위안이 있다. 나란히 걷지 않아도 나를 지켜봐 주고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위로가 된다.

소녀는 짧은 동굴 여행의 유일한 동행자였지만 전부인 동행이었다. 소녀가 없었다면 아마 난 동굴 끝까지 가지 못했을 것 같다. 나도 소녀처럼 존재만으로 안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사람을 하나쯤 두어 절망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의 길을 성큼성큼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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